20190917-1029 까미노데산티아고 프랑스길③
2019.09.27.
손탑같은 그믐달이 뜬 새벽, 그리고 이내 쨍한 햇볕.
과감히 삼각대와 작별.
꿀같은 하루 휴식 후, 다시 까미노를 시작했다. 밤엔 꽤 추운 날씨인데, 알베르게 방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자는 바람에 추워서 일찍 깼다. 우리에게 휴식을 선물했던 에스테야를 떠나 다시 까미노에 들어섰다. 쉬어서인지, 걷는게 익숙해져인지, 길이 쉬워서인지 잘 걸었다. 오늘 코스는 목적지 Los arcos까지 20키로 남짓한 쉬운 길이었다. 마지막 10키로정도가 마을이 없는 고독한길이라고 들었는데 같이 걸어서인지 편안했다. 그동안의 길중 가장 평탄하고 쉬웠다. 덕분에 이른 시간에 마을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알베르게로.
공립 알베르게가 별로라는 평이 있었는데 스텝분들도 친절하시고 잔디 마당이 넓어 좋았다. 씻고 햇볕이 쨍한 마당에서 빨래를 널고 맥주를 마시는데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순례길의 배움이란건 이런 사소한 것들이 주는 행복이구나 싶다. 여전히 여기 저기가 욱신거리고 불편하지만 이 또한 익숙해져서 괜찮다. 5일을 견디는 동안, 고통과 두려움의 정체를 알게 되었고, 알고 나니 견딜만 하다고 믿게 되었다. 이제는 모든게 좋다.
밥을 사먹으려 돌아다녔지만 마땅한 게 없어 결국 또 요리를 하기로 했다. 감바스 재료를 샀는데 새우가 너무 비쌌다. 불조절과 간 맞추기에 실패해서 아쉬운 맛이었지만 술김에 다 먹었다.
하루가 금세 간다. 시간이 빨리가는 건 좀 아쉽다.
2019.09.28.
그늘에서 쉬면 바람이 솔솔.
늦잠 자고 일어나 삶은 달걀로 끼니를 떼우고 출발했다. 직선으로 이어진 평탄한 길을 하염없이 걷다가 뒤를 돌아봤는데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뒤를 돌아볼 때마다 다른 빛을 뿜어내는 하늘. 매일 다른 길에서 해가 뜨는 걸 볼 수 있어 행복하다.
며칠전부터 배가 부글부글 한다. 변비는 사라진 것 같은데 소화가 잘되는건지 똥이 계속 마렵다. 안하던 운동을 계속 해서 위장이 자극되나. 여튼 건강해지는 중이면 좋겠다.
애인의 어린 시절 얘기를 들으며 걸었다. 그는 어떤 이야기든 꾸밈없이 솔직하고 담담하게 들려준다.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가 존경스럽다. 한편으론 외면해왔던 내 지난 삶들이 떠올라 마음이 복잡했다. 무수한 잘못을 저지르고 그것을 회피 혹은 변명하며 살아왔고, 지금도 그리 살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우린 하루에 이십키로 정도만 걷기로 했다. 오늘의 목표 비아나까지 길이 평탄하여 금세 도착했다. 에너지가 남아 약간 아쉬워 더 걸을까도 싶었지만 욕심내지 않고 머무르기로 했다. 비아나는 작고 아기자기한 마을이었다. 거리 곳곳이 북적여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웬걸, 마침 맥주축제날이란다! 열두시까지 시끄러울 예정이라는 오스피딸레로 설명에 네네 좋아요!하며 후다닥 씻고 축제를 즐기러 나갔다. 여러 맥주 부루어리들이 부스를 차리고 저마다 맛난 맥주를 팔고 있었다. 티켓을 사면 각 부루어리마다 한 잔씩의 맥주를 골라 맛볼 수 있다. 티켓을 사고 잔을 받아 부스로 달려갔다. 양이 조금 아쉬웠지만 맥주 맛은 기가 막혔다. 역시 나는 진한 IPA가 좋다. 바로 앞 잔디밭에 누워 기가막힌 풍경과 함께 여유를 누렸다. 이게 사는 맛이지 싶은 순간. 팍팍한 삶의 순간에 이 시간을 떠올리려 애써봐야지.
저녁은 처음으로 외식을 하기로 했다. 애인님이 냄새로 유혹당한 식당을 찾아가 순례자 메뉴랑 소고기 스테이크를 시켰다. 가스파초 처음 먹어봤는데 맛있다. 스테이크는 메뉴를 잘못 주문했나 싶지만 맛있게 먹었다. 무엇보다 와인 한병을 주셔서(원래 순례자 메뉴에 포함된 와인은 한잔이다) 취하도록 마셨다.
2차는 다시 맥주 파티. 밤이 되자 남녀모소가 모두 모여 광장이 북적였다. 어린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시골의 맥주 축제라니. 낯설고 신기한 풍경이었다. 해가 저문 주홍색 하늘빛을 구경하며, 그 빛깔과 닮은 맥주를 마셨다. 황홀하고 감사한 시간이었다. 비아나에 머물길 잘했다.
2019.09.29.
조금 늦게 일어나 정든 비아나를 떠났다. 몸이 순례길에 적응되어 이쯤에서 이만큼, 쉬고 걷고 자유롭다. 한참을 걸어 큰 도시 로그로뇨로를 지나갔다. 축제가 끝난 아침의 도시는 조용하고 한산하다. 약국에 들러 약을 사고, 빵집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빵이랑 커피를 따로 주문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소통이 어려워 한참을 기다렸다. 빵은 엄청 맛있었다. 가격도 착하고.
덕분에 많이 쉬고 다시 출발. 로그로뇨를 벗어나자 엄청 큰 공원이 나왔다. 일요일이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아빠들이 많았다. 꼬마들을 구경하며 한참을 걷고 오르고 나서야 공원을 벗어났다. 다시 마을 한점 없는 길을 걸어 우리의 목적지 나바레떼에 큰 고비 없이 도착했다. 이제는 정말 이렇게 산티아고까지 갈 수 있겠구나란 생각이 든다.
오늘 묵는 곳은 할아버지들이 자원봉사자로 관리하시는 시립 알베르게다. 짐을 풀고 장을 보려는데 일요일이라 마트가 문을 닫았다. 하는 수 없이 라면을 끓여 먹었다. 라면 두봉에 사람들이 남기고 간 파스타면까지 넣어 배불리 먹었다.
산 미켈 데이라던가. 오늘도 마을 잔치가 벌어지는 날이란다. 오후부터 어린이들을 위한 공연이 펼쳐지고 한쪽에선 먹거리를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밤이 되자 광장에서 공연이 시작되고 사람들이 붐비기 시작했다. 우리도 맛있는 냄새를 따라가서 2유로짜리 먹거리를 샀다. 세라믹으로 유명한 이곳의 도자기 그릇에 오돌뼈 볶음, 바게트, 와인으로 구성된 알찬 메뉴였다. 음식에 감동하며 공연 감상. 어린 아이들이 맨 앞줄에 앉아 공연을 구경하더니 마침내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춤추며 공연을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우리의 축제나 놀이문화는 늘 세대가 갈리는데, 아이들과 함께 즐기는 축제라니 신선했다. 이런 시골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놀랍다. 재미난 율동을 따라 추다가 들어왔다. 어제 오늘 축제를 즐기느라 밤이 피곤하다.
베그버그인지 모를 흉터가 계속 가렵고 부어있다.
2019.09.30.
아침은 선선했는데 오후가 되니 해가 뜨겁다.
생리통으로 잠을 설치고 일어났다. 잘 걸을 수 있을까. 어제 남은 오돌뼈와 샐러드, 식빵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축제에서 받은 도자기 그릇이 사라졌는데 할아버지 오스피탈레로께서 자기걸 챙겨주셨다.
잠을 못자서인지 생리 때문인지 몸에 기운이 없어 아침부터 터벅터벅 느리게 걸었다. 배가 아프니 다른 고통은 모두 하찮게 느껴졌다. 나의 애인도 졸음과 싸우고 있었다.
중간 마을인 벤또사를 거치지 않고 직진했더니 마을이 하나도 없는 길을 걸어야했다. 엉덩이에 땀이 차고 피가 샐까 걱정되었지만 길가에서 생리대를 갈기에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더 필요했다. 큰 마을인 나헤라까지 오기로 걸었다. 둘다 상태가 좋지 않아 짜증이 난 상태로 나헤라 바에 도착했다. 맥주와 주스를 마시며 여기서 멈출지 다음 마을까지 갈지 의논하다 다음 마을까지 가기로 결정했다. 마을을 나서기도 전에 배가 아파와서 괜히 출발했나 싶었지만 길을 돌아가긴 싫었다. 한시가 지난 아스팔트 길은 뜨거웠다. 그늘 한점 없는 오르막을 오르고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진 길을 계속 걸었다. 기운이 없어 어지럽기까지 했다. 5.7키로의 그 길이 내겐 가장 힘든 길이었다.
온갖 징징을 쏟아내며 목적지 아소프라에 도착. 알베르게가 딱 하나 있는 작은 마을에 생각보다 많은 순례자들이 와있었다. 한국인은 우리뿐이었다. 나쁘지 않다. 게다가 2인실에 단층 침대를 쓸 수 있는 곳이라니. 10유로가 아깝지 않은 역대급 알베르게였다. 험난한 길을 기어코 걸어온 보람이 있었다. 여느 때처럼 씻고 빨래하고 장을 봤다. 작은 마트에서 얼음을 사서 얼음콜라를 먹었다. 이 순간만큼은 맥주 부럽지 않은 인생 콜라였다.
애인과 함께여서 좋다. 외롭지 않아서 좋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여서 좋고, 더 가까워질 수 있어서 좋다. 그런데 계속 같이 있어서인지 그는 내가 아님을, 타인임을 잊어버리고 나와 같기를 기대하는 어리석은 나를 발견한다. 마음이 삐그덕 거리는 순간마다 머리론 납득되지 않는 서운한 마음이 몰려든다. 우리는 각자의 기대와 각자의 자리에서 여기에 온 것임을, 그러기에 서로에게 애써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2019.10.01.
언덕 위 바람이 시원하게 분다. 모자를 벗어 땀을 식힌다.
모처럼 늦잠을 잤다. 알람을 꺼버리고 일곱시 반이 되어 겨우 일어났다. 사람들이 남기고 간 빵으로 식사를 하고 꼴지로 출발했다. 나쁘지 않다. 오늘은 코스가 짧다. 어제 한 마을 더 온 덕분이다.
아소프라에서 오늘의 목적지 산토 도밍고 데 까세다까지 16키로 정도다. 가장 짧은 거리를 걸었다. 물론 똑같이 아프고 때로 쉬어야 하고 힘들었지만, 그 시간이 금세 끝났다. 오늘 걷는 길이 까미노에서 손꼽히도록 아름다운 길이란다. 완만한 언덕을 오르는 길. 광활한 땅들이 펼쳐지는 풍경을 때로 눈에 담고, 대체로 흘려보내며 걸었다.
천천히 걸으며 어제 이야기도 나눴다. 어젯밤 우린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장 멀리 떨어진 시간을 보냈다. 알 수 없는 감정들로 마음이 요동치던 시간이 지나고, 조금은 정리된 마음 속 이야기를 꺼냈다. 어제의 기억을 하나 하나 되짚어보며 서툴고 찌질한 내 모습과 마주해야 했다. 그의 마음도 들었다. 후회되고 미안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했을까. 감정적인 갈등이 고조되는 순간 나는 늘 회피하고 만다.
산토 도밍고가 만들었다는 제법 큰 마을에 열두시반에 도착했다. 가장 빠른 도착이다. 더 걸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으나 그만 걸으니 좋았다. 다소 비싸지만 시설이 좋은 공립 알베르게에 묵기로 했다. 큰 마을이어서인지 순례자들로 북적였다. 빨래하고 근처 식당에서 립스테이크와 폭찹을 점심으로 먹었다. 스페인어로 학습해온 아로스꼰레체도 먹었다. 비쌌지만 맛났다.
저녁은 햄버거를 만들어 먹기로 했다. 장을 봐와 요리를 하려는데 주방이 단체 그룹으로 번잡했다. 어마어마한 양의 파스타를 만드느라 사용할 수 있는 식기구가 없을 정도. 겨우 자리를 비집고 만들었다. 함께 요리해 먹으니 뭐든 맛있다. 혼자였음 몇번이나 해먹었을까. 아침 점심 도시락까지 준비하고 잠들었다.
2019.10.02.
강수확률 0프로인 맑은 날이 계속됨
밤 늦게까지 번잡스러웠던 알베르게를 떠나 21키로를 걷는 날이다. 일찌감치 일어나 준비했으나 아침 먹고 나니 벌써 7시다. 천천히 수다떨며 걷는 길이 즐겁다. 길가다 애교쟁이 고양이를 만났다. 여기 고양이들은 사람을 보고 피하지 않는다. 가는 길에 아침에 들고 나온 빵으로 점심을 떼웠다. 오후엔 학교 얘기를 하며 걸었다. 그에게 학교얘기를 할 때마다 방어적인 태도가 되는 나를 발견한다. 비판과 질문들에 열려있기에는 자신감이나 확신이 부족한가 싶다.
대화에 몰입하다가 알베르게를 지나친 줄도 모르고 벨로라도 성당에 도착했다. 앞으로만 가는 데 익숙해서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려니 500미터인데도 참 멀게 느껴졌다. 오늘 묵기로 정한 곳은 호텔 알베르게라는 이름을 가진 사설 알베르게다. 마을 중심부에서 떨어져 있어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이었다. 씻고 세탁기를 돌리고 마을 산책을 했다. 마을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피자빵을 만들어 먹기로 하고 재료를 사서 돌아갔다. 그런데 같은 알베르게에서 묵는 한국인 부부가 식사를 초대해 주셔서 같이 먹게 되었다. 팜플로냐에서였나, 이 부부를 처음 만났는데 이후에 길에서 드물게 만나곤 했었다. 한국에서 가져오신 양념으로 볶은 맛난 돼지고기와 야채들을 폭풍 흡입했다. 부부는 교사로 일하시다 퇴임하고 순례길에 오셨다면서 그간의 여정을 들려주셨다. 맥주와 와인을 마시며 즐거운 수다.
뒷정리를 하고 피자빵을 만들었다. 내일 아침 점심으로 먹을 거였는데 만들면서 또 먹었다. 살이 포동포동 찌는 순례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