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17-1029 까미노데산티아고 프랑스길④
2019.10.03.
하늘은 맑은데 바람이 차다. 그늘에서 쉬면 추워져서 금세 출발해야 한다.
일찌감치 일어나 어제만든 피자빵으로 아침을 먹고 출발했다. 손이 시려울정도로 날씨가 춥다. 오늘은 빌라프랑카까지 12키로 정도만 걷고 부르고스행 버스를 탈 예정이다. 어제 우린 주 1회는 쉬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며 부르고스 숙소를 예약했다. 빨리가서 쉬고픈 마음에 발걸음이 가볍다.
저 멀리 마을이 보이고 구릉이 펼쳐진 아름다운 길을 애인과 수다떨며 걸었다. 캐나다에서 오셨다는 나이드신 커플을 만나 풍경과 음악과 교육에 대해 짧지만 인상적인 대화도 나누었다. 그리고 서로의 옛 연애 얘기를 하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걸었다. 그와 옛날 얘기, 그러니까 우리의 20대 시절 이야기를 나누면 기분이 이상하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서로 잘 몰랐던 시절. 우리의 얘기에서 각자의 얘기로, 그러다 우리의 얘기로 귀결되는 수다. 인식과 실재의 간극이 느껴져 새삼스럽고 낯설다. 연애하며 그를 다시 알아가는 게 즐겁다.
버스를 타고 점프하기로 한 빌라프랑카에 도착. 스페인식 순대를 파는 맛집이 있다는 정보에 먹고 가려 했으나 버스 시간이 촉박하여 포기했다. 버스를 타고 달리니 그동안 걸었던 시간이 체감되었다. 차는 이렇게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구나. 풍경들이 슝슝 지나간다. 사십여분을 꿀잠자며 달려 대도시 부르고스에 도착했다.
어마어마한 규모와 화려함을 자랑하는 부르고스 대성당을 마주보며 광장에서 밥을 먹었다. 그리고 마트에서 삼계탕 재료와 술을 잔뜩 사들고 예약해둔 숙소로. 전 숙소 만큼은 아니지만 위치도 시설도 괜찮았다. 낮잠 한숨 자고 삼계탕 요리 시작. 닭손질도 삼계탕도 처음이었는데, 나름 성공적이었다. 마늘과 간장이 있으니 두려울 게 없다. 뜨끈한 국물을 폭풍 흡입하며 술도 술술. 행복한 삼백일 파티를 벌였다. 그 와중에 발톱도 깎고 빨래도 하고 스트레칭도 했다. 누가 순례길을 여유롭다 했나. 쉴 때도 바쁜 순례자의 하루.
2019.10.04.
쌀쌀하다.
밥을 싸가겠다고 알람을 아홉시쯤 맞춰놓고 일어났다. 토스트를 하고 밥을 짓고 계란 후라이에 밥을 비볐다. 어제 먹다 남은 삼계탕을 아점으로 먹고 퇴실. 먹고 사는 게 이토록 사람을 바쁘게 만들다니.
공립 알베르게가 근처에 있었다. 문을 열기 전부터 줄을 서서 기다렸다. 쉬었다가 점프를 하니 그간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도 보였다. 우다니즈와 팜플로냐에서 만났던 한국인 부부와 청년들, 뿌엔떼 라 레이나에서 삼겹살을 함께 먹은 청년, 길에서 종종 만나던 영국 청년. 큰 도시라 연박을 하며 쉬어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밥 해먹는 곳은 없지만 시설은 쾌적했다.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랑 비슷한 느낌인데, 세면대가 곳곳에 있어 편하다.
짐 풀고 부족한 잠을 청했다. 오후 늦게 나가 어제 지나쳤던 부르고스 대성당을 구경했다. 순례자 크레덴샬을 가져가면 입장료를 할인해준다. 금빛으로 화려한 내부와 각각의 컨셉이 있는 듯한 많은 예배당들이 있었다. 영어로 된 오디오가이드에 피로가 몰려와 좌절했지만 눈으로 담았다.
광장으로 나오니 곳곳에 시장이 열리고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다시 주말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10월 주말마다 축제를 하는 걸까. 아침에 싸온 계란밥을 저녁으로 먹고 축제를 구경했다. 마을 사람들이 옛날 복장으로 코스프레를 하고 나와 놀고 있었다. 광장 곳곳에 대형 놀잇감들이 마련되어 있고, 한 켠에는 수동으로 돌리는 회전목마가 등장했다. 축제에 아이들을 위한 놀거리, 볼거리가 우선적으로 마련되고 그것을 함께 즐기는 문화가 참 보기 좋다. 나름 대도시인데 이런 정겨운 분위기라니. 어딘가에 끼어서 놀고 싶었지만, 다시 걷기 시작할 내일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2019.10.05.
한 시간여쯤 걸어도 땀이 잘 나지 않아 가을이구나 싶다. 빨래가 차갑다.
다시금 힘을 내어 걷는 날. 계란밥 2탄을 아침으로 먹고 정겨웠던 도시 부르고스를 떠났다. 밀밭이 펼쳐지는 메세타 평원이 시작되었다. 누군가는 지루한 길이라 했는데, 끝없이 광활한 평원을 바라보며 우린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요즘 우리 까미노의 뜨거운 감자는 지난 연애 스토리다. 연인 사이에 과거를 나누는 건 대체로 현명하지 못한 일이겠으나, 오랜 친구였던 우리 사이엔, 그리고 변명과 회복의 기회가 충분한 이 길 위에선 추천할만한 일이다. 쿨하고 노련한 연애는 없기에, 마음이 쿵쾅거렸다가 안심이 되기를 반복하며 대화했다. 그에게 들려주며 돌아본 나의 연애는 참 나만큼이나 애처롭고 정신없다.
지난 숙소에서 만난 한국인 일행들은 30키로를 걸어간다는데 우린 20키로만 걷기로 했다. 목적지 Hornillos에 도착해 미리 봐두었던 미팅포인트 알베르게로 갔다. 깔끔한 소규모의 사립 알베르게이고, 석식과 조식이 제공된다. 코스를 비껴가니 만나는 사람들도 바뀐다. 함께 묵는 방에 새로운 한국인들이 있었다. 우리랑 비슷한 시기에 생장에서 만나 함께 천천히 걷는 일행들이었다. 까미노에선 걷는 속도와 스타일에 따라 자연스레 무리가 지어진다.
빨래를 해서 넓은 잔디 마당에 널어놓았다. 외부 맥주 반입이 안되어서 슈퍼 앞에서 사먹고, 숙소 맥주도 또 사먹었다. 도보후 낮맥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중요한 회의. 한국에 돌아가기 전 포르투 여행을 위해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에 도착하는 날을 정하기로 했다. 그것에 맞춰 남은 까미노 일정을 계획했다. 앞으로 5일을 더 걷다가 다음 대도시인 레온으로 점프, 최초로 2박 3일을 쉬기로 했다. 경험해보니 1박은 겨우 정비나 할 뿐 쉬는 게 아니다. 그리고 다시 점프하여 산티아고까지 걸을 계획이다. 포르투 숙소와 레온 숙소를 예약했다. 이제 이 일정대로 가면 된다. 벌써 끝을 세어보는 날이 되다니, 어떨떨하다.
일곱시,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식당에 가니 엄청난 빠에야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껏 먹은 음식 중 맛으로나 양으로나 손에 꼽힌다. 와인과 샐러드, 빠에야와 요거트까지 준비되는 훌륭한 식사였다. 별이 예쁘다던데, 일찍 누워 잠들었다.
2019.10.06.
하늘에 구름이 많아 걷기 좋다.
3유로짜리 아침을 먹고 아직 깜깜한 길을 나섰다. 별을 보는 알베르게가 있다는 산볼을 지나쳐 오르막에 오르자 등 뒤로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잠시 멈춰 해가 뜨는 걸 바라보다 기념 사진도 찍었다. 매일 해가 떠오르는 하늘을 감상할 수 있어 황홀하다.
오늘의 목적지 Castrojeriz까지는 20여 키로. 걷기 딱 좋은 거리다. 메세타 평원을 감상하며, 때때로 만나는 마을을 세어가며 도착했다. Castrojeriz는 언덕 위에 멋진 성이 남아있는 마을이었다. 한국인이 운영하여 라면을 판다는 오리온 알베르게의 유혹을 지나쳐 한참을 걸었다. 돌아가기엔 너무 먼 길을 왔을 때 쯤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 할아버지 오스피딸레로가 계시는 오래된 느낌의, 그러나 잘 관리된 숙소였다. 각각 2층 베드를 주셔서 좀 실망했지만 나이드신 분들을 1층으로 배정해주시는 것 같아 수긍했다. 처음으로 자본 2층 베드도 나쁘지 않았다. 좁은 주방이지만 조리 시설이 있고, 짤순이도 있고, 순례자들을 위한 빵을 계속 사다주셔서 좋았다. 단돈 5유로에!
매일 걷기만 하는데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지. 생각지도 못했는데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문을 닫은 마트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근처 레스토랑에서 시원한 맥주나 들이켰다. 숙소로 가니 마침 에스테야에서부터 만나던 광주 부부께서 함께 밥을 먹자고 해주셨다. 오리온 알베르게에서 고추장을 사오셨단다. 묵혀둔 북어국을 꺼내고 쌀밥에 고추장을 감탄사를 연발해가며 뚝딱 해치웠다. 한국 음식 사랑한다.
술 없는 밤이 아쉬워 마을을 헤매다 사람들을 따라 문 연 조그만 구멍가게를 찾아갔다. 그러나 노 아이 알콜. 오렌지 주스로 아쉬움을 달래며 동네 산책을 마쳤다. 천장이 높고 넓은 홀의 2층 침대에서 잠드는 밤. 굿나잇.
2019.10.07.
핑크빛 일출과 통통한 반달. 응달과 양달의 어마어마한 온도차.
알베르게에 무릎보호대 강제 기증.
어젯밤 같은 숙소에서 묵던 한국 남자분이 그랬다. 저 언덕을 내일 넘어야해요. 높은 성벽을 뒤로하고 마을을 빠져나오자 언덕길이 보였다. 성큼 성큼 올라가는 앞선 순례자를 따라 나도 오랜만에 오르막길 페이스를 내보았다. 까미노 초반엔 시도때도 없이 등장하는 오르막길을 이 악물고 올랐는데 요 며칠 계속 평지만 걷다보니 작은 오르막도 긴장하게 된다. 꽤 올랐다. 오르면서 뒤편으로 하늘이 붉어져 뒤돌아 감탄하며 올랐다. 정상에 다다라서 한숨 돌리며 일출을 감상할 겸 앉았다. 지지난밤 숙소에서 만났던 한국분들을 만났다. 초콜렛을 나눠주셨다. 숙소에서 싸온 빵을 아침으로 먹고 다시 출발.
내리막을 내려와 다시 시작되는 끝없는 평야. 땅의 모양이 이리 다르다는게, 그리고 놀고 있는 땅이 이렇게나 많다는 게, 좁은 땅에 북적대며 살아가는 한국인에겐 신기할 따름이다.
오늘은 25키로 정도를 걸어야 한다. 중간에 마을이 없어서 오랜만에 길게 걷는다. 그렇지만 배낭 무게도 많이 줄고,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자신감이 생겼다. 잠시 들른 바에서 포장해온 순대버거와 남은 빵을 점심으로 먹었다. 어깨가 무지 아파 쉬기를 반복하며 프로미스타에 도착했다.
스페인 시골 시에스타에 익숙해진 우리는 알베르게 가기 전 마트에 들러 맥주와 콜라를 샀다. 콜라를 마시니 마치 지금까지 힘들었던 게 콜라를 마시지 않아서인것 처럼 느껴졌다. 마당이 있는 아늑한 느낌의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공립인데 부부가 운영하는 사립 느낌이었다. 씻고 빨래하고 맥주를 마시는 일상이 좋다. 이런 단순한 일상을 살고 싶어 여기에 왔지. 저녁까지 마트가 문을 닫아 모두 굶주리는 시간, 우리도 맥주로 배를 채우며 저녁을 기다렸다. 조리 시설이 없어 오늘은 바에서 저녁을 사먹기로 했다. 광장 근처 레스토랑에서 순례자 메뉴와 스파게티를 시켰는데, 비싸기만 하고 맛은 별로였다.
캔맥을 들고 알베르게 앞에서 잔을 기울였다. 광장 한켠에 그동안 종종 만나오던 한국인 어르신들의 수다 모임이 벌어졌다. 배낭을 짊어 지고 순례길에 오르는 부모 세대가 이리 많다니. 신기한 일이다.
일찍 잠자리에 누워 바로 기절했다.
2019.10.08.
쏟아지던 별을 만난 새벽. 구름이 많아 걷기 좋은 하늘. 빨래 널 땐 뜨거운 태양.
하루가 짧아지면서 사람들이 점점 느려지는 건지, 까미노 중후반부라 게으른 사람들이 많아진 건지, 기상시간이 다들 늦다. 여섯시 반 즈음 인기척에 깨었다. 조식을 신청해놔서 여유롭게 준비하고 밥먹고 나왔다.
걷는 길이가 짧고 길이 평탄하여 마음이 여유롭다. 이제 우리만의 속도가 생겨 한시간에 어느 정도 갈 수 있는지, 이 정도 거리라면 언제쯤 도착할지 가늠이 된다. 익숙함, 예상가능함은 여유와 편안함을 준다. 처음 까미노 길에서 잔뜩 긴장했던 우리는 어느새 남은 길과 당장의 할 일 말고도 지나가는 풍경을, 서로를, 한국에서의 삶을 바라보고 얘기한다.
지평선이 보이는 곧고 평탄한 길을 보며 까리온 데 로스꼰데스까지 19키로 정도를 걸었다.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는 땅이 끝없이 이어질것 같다가 저 멀리 마을이 보이면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그제부터 만난 한국에서 온 카톨릭 신자들 세분을 따라 수녀님이 운영하신다는 알베르게로 갔다. 수녀님이 쿠키와 차로 맞이해주셨다. 이곳 수녀님 알베르게가 단층 침대에 시설이 좋다고 들었는데, 가보니 이층침대에 좁은 방이어서 약간 실망했다. 알고보니 수녀님이 운영하는 알베르게가 두 군데라고 한다. 다른 수녀님 알베르게를 찾아가 어제 만난 한국 어르신 분들께 인사하고 왔다.
주방 시설이 있어 점심으로 짜파게티를 끓여먹고 저녁은 장봐서 감바스를 해먹기로 했다. 중간에 수녀님 주관으로 노래하는 순서가 있어 참여했는데 특별한 시간이었다. 해맑은 표정과 목소리로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수녀님한테 반했다. 나도 저런 표정과 목소리를 가진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서툰 스페인어로 자기소개도 하고 한국 사람들과 아리랑을 불렀다.
감바스는 불 조절이 쉽지 않아 마음처럼 되지 않았으나 그래도 맛있게 먹었다. 감바스에 파스타를 넣어 또 먹었다. 언젠가 진짜 스페인 감바스를 사 먹어보긴 해야겠다. 와인과 맥주로 취하는 밤.
2019.10.09.
오전엔 구름 많아 덥지도 춥지도 않아서 걷기 딱 좋다.
눈이 떠지지 않아 겨우 일어났다. 요며칠 만난 카톨릭 신자 분들과 인사를 했다. 오늘부터 코스가 달라져 서로의 안녕을 기원했다. 짬뽕 스틱을 챙겨주셔서 감동했다. 우린 내일 레온으로 점프하기 위해 오늘 조금 더 걸을 예정이다. Terradillos de templarios까지 26키로 정도다. 내 발 상태와 애인의 무릎이 좋지 않아 오랜만에 동키를 보내기로 했다. 짐 없이 걸으니 긴 거리도 두렵지 않았다. 날씨도 좋고 평탄한 길이 계속되었다. 친구 연애얘기, 19금 얘기를 하며 걸어서 지루하지 않았다.
마침내 마을에 도착. 우리가 짐을 보낸 알베르게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6인실은 다 차고 10유로 짜리 4인실 방 뿐이어서 여기에 묵었다. 시설은 사설답게 깔끔하고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파리가 좀 많았는데 알고보니 옆에 축사가 있었다. 4인실에 묵으니 아늑하고 조용해서 꿀낮잠을 잤다. 그리고 알베르게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순례자 메뉴로 저녁 식사를 했다. 볼로네제와 참치 샐러드, 소고기 스테이크, 대구살 스테이크를 먹었는데 꿀맛이었다. 와인 한병도 클리어. 애인은 볼로네제를 극찬하며 한 그릇 더 먹었다. 지금껏 사먹은 음식중 맛도 가격도 손에 꼽히는 식사였다.
배부른 채로 다시 꿀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