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의 여운을 간직한채로 다시 관광모드. 머나먼 유럽까지 왔으니 최대한 여행하고 가는 것이 동료들의 계획이었고 나도 따라 나서기로 했다. 여행지는 영국과 가까운 아일랜드, 그리고 이곳에서 저렴하게 이동할 수 있는 휴양지인 몰타로 정했다. 나는 동의만 했을 뿐 여행 장소와 계획, 숙소 등등을 알아보고 예약하는 귀찮은 일을 모두 동료들이 해주었다. 덕분에 아무런 준비나 고민 없이 따라다니며 안락한 여행을 즐겼다.
영국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이동하는 날. 가난한 자들의 항공기인 라이언에어를 타기 위해 아침부터 무게를 재어가며 짐을 꾸렸다. 늦지 않게 스텐스포드 공항에 도착했는데 짐 검사 하는 곳이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아마도 여기가 영국에서 가장 번잡스러운 곳일 것 같았다. 재난 대피소 마냥 곳곳에서 짐을 풀어 해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액체류와 전자기기를 꺼내는 거였다. 연고나 치약 마저도 정해진 투명 비닐에 담아 따로 검사받아야 했다. 입출국이 까다로울수록 죄 많은 나라라더니 영국은 그럴 법도 하지 싶었다. 그래도 이게 영국의 마지막 이미지라니 참 별로다. 영국과 사이가 좋지 않은 아일랜드로 떠나기 위한 정신무장으론 괜찮은 코스려나.
더블린은 수도라기에는 한적하고 어딘가 정겨운 분위기였다. 시내 번화가도 사람들이 붐비는 골목 골목이 있을 뿐 번잡스럽지 않았다. 한국으로 치면 지방의 중소도시 같은 느낌. 관광객도 별로 없어 보였다. 런던과는 또 다른 분위기에 금세 매료되었다. 우린 중심가에서 좀 떨어진 대학교 기숙사 같은 곳에 묵었다. 낡긴 했지만 독방 구조여서 정말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더블린 여행 3일 중 하루는 쉬고, 하루는 골웨이 모허 절벽 투어, 하루는 기네스 양조장과 시내 구경을 했다. 아일랜드 분위기를 느끼기엔 너무 짧은 일정이었다. 특히 골웨이 투어는 골웨이 한시간, 모허절벽 한시간, 나머진 차에서만 여섯시간 넘게 보냈다. 바닷가 마을 골웨이 분위기가 참 좋았는데, 너무 짧은 일정이 아쉬웠다.

더블린에서 버스를 타고 벨파스트로. 벨파스트는 아일랜드 섬에서 영국령으로 남아있는 북아일랜드의 주도다. 영국의 오랜 지배와 아일랜드 독립, 그 과정에서 영국령으로 남게 되면서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북아일랜드에 들어서자 영국 국기와 북아일랜드 국기가 함께 걸려있는게 보였다. 관에서 걸어놓은 거겠거니 했는데, 우리가 묵는 숙소 부근에도 두 깃발을 걸어놓은 집들이 있었다. 알고 보니 강경한 영국 연합주의자들의 표현이란다. (북아일랜드에는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 영국 연합주의자들, 온건파들이 뒤섞여 살아가고 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벨파스트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곳곳에 갈등의 흔적, 혹은 갈등을 애써 봉합한 흔적들이 보여 혼란스러웠다. 벨파스트 유명 관광지인 타이타닉 박물관도 구경. 타이타닉 호를 만든 배경부터 출항, 침몰 사고 기록들이 엄청 자세히 전시되어 있었다. 자연히 떠오른 세월호. 우리는 언제쯤 진실에 가까이 갈 수 있을까.
짧은 아일랜드 관광을 마치고 휴양을 하러 몰타로. 영국, 아일랜드 모두 날씨가 추워 어서 따뜻한 곳으로 가고싶었다. 몰타는 그전까지 들어본 적도 없었는데 바다에서 휴양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정해진 곳이다. 지중해에 있는 작은 섬나라 몰타는 유럽인들이 즐겨 찾는 휴양지이고 영국 지배를 받았던 영향으로 영어를 사용(몰타어도 있다)한다. 최근 한국인들에게 인기있는 어학연수 코스라고 한다. 우린 옛 수도 임디나를 여행하고 해변으로 이동해 노는 일정이다. 밤에 도착한 몰타는 한여름 시골에 온듯 깜깜하고 조용했다. 특히 우리가 머무른 임디나는 침묵의 도시라는 별명이 끄덕여지는 곳이었다. 한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모든 소음을 가라앉히고, 밤에는 어둠이 사람의 흔적을 덮어버리는 곳. 낮과 밤이 교차되는 시간만이 집 밖에 나와 맥주를 마시며 담소 나누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낮에 시내에 나간 동료들은 시에스타가 있을 수밖에 없는 날씨를 체감했단다. 구름 한 점 없이 작렬하는 태양에 추운 기운은 금세 사라지고 나도 한껏 게을러졌다. 볕이 좋은 옥상에서 빨래가 마르는 걸 보며 해가 넘어가길 기다리가가, 해질 무렵 세인트 폴 대성당에 올라 밤을 맞이하는 몰타를 구경했다. 사암으로 지어진 임디나의 오랜 건물들은 햇볕이 아직 남아있는 이 시간에 가장 빛나는 듯 했다. 어쩐지 경건해지던 임디나의 밤, 마음에 들었다.

다음날은 블루라군 투어에 다녀왔다. 몰타 교통카드 중 배편이 포함된 것이 있어 일찌감치 나섰는데, 정작 블루라군 바다에서 노는 시간은 엄청나게 짧고 배로 긴 시간 투어가 진행되는 일정이었다. 블루라군도 아름다운 바다색을 감상하기 어려울만큼 사람반 물반. 투어는 알아듣기 힘든 영어 설명이 지루하게 이어지며 세시간을 배에 갖혀 있었다. 그래도 오랜만의 바다에 감격하여 점심도 포기하며 놀았다.
본격 휴양을 즐기러 떠난 다음 숙소는 몰타섬 동쪽 마르사스칼라라는 곳에 있는, 바다뷰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집 앞 바다가 지중해라니. 에어컨이 고장나는 등 관리가 잘 되지 않는 집이었지만 창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좋았다. 관광지 슬리에마나 수도 발레타와는 좀 떨어져 있어 한가하게 바다를 즐길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숙소 앞 바다는 아무데나 들어가 물놀이를 할 수 있도록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한낮의 태양을 피했다가 오후 네시쯤 바다로 나가 해수욕을 즐기는 나날을 보냈다. 물이 깊어 스노쿨을 끼고 물고기들과 유영하기 좋은 바다였다. 높은 바위에서 다이빙을 하며 노는 아이들을 따라 나도 용기를 내어 물에 몸을 내던져보기도 했다. 뛰어봤자 바다라는 걸 아는데도 중력에 몸을 내맡기는 건 무섭다. 어른이 되면 겁이 더 많아지는건지, 아이들은 제 키보다 높은 바위에서 풍덩 풍덩 잘도 뛰어내린다. 동료들이 있어 좋았다. 혼자 하기 어렵거나 재미없는 것 중 하나가 해수욕인 것 같다. 같이 즐기는 사람이 있어 바위에서 뛰어내리기도, 저 멀리까지 헤엄쳐 가보기도 했다.
마침내 몰타의 정직한 일출까지 구경하고 동료들과의 여행은 끝이 났다. 이곳 저곳 돌아다닌 곳이 많아 길면서도 짧은 여행이었다. 적당히 가까운 관계여서 너무 심심하거나 피곤하지 않게 여행할 수 있어 좋았다. 덕분에 좋은 데서 자고 잘 챙겨먹고 다녔다. 물론 게으른 나를 거둬준 바지런한 사람들 덕분이다. 각자 비행기 시간에 맞춰 차례 차례 헤어지고 나는 몰타에 홀로 남았다. 긴 여행이 이제 열흘 정도 남았다.
몰타 본섬 옆에 있는 작은 섬 고조가 좋다기에 미리 혼자 머물 숙소를 예약했다. 성수기인지 숙소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휴양하겠다는 일념으로 비싼 숙소를 눈물을 머금고 결제했는데,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만족스러웠다. 이탈리아 부부(가까워서인지 몰타에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참 많다)가 운영하는 숙소였는데 몰타 감성이 가득한 공간을 잘 관리하고 계셨다. 그림과 요리가 특기인 아주머니는 아침마다 정갈한 조식을 코스로 대접해주셨고 웃음 많은 아저씨는 늘 친절하고 자세하게 안내해주셨다. 내가 묵는 방에는 깔끔한 침대와 아담한 욕실, 최신식 에어컨이 있고 다른쪽 방문을 열면 작은 수영장이 나타난다. 숙소에서만 머물러도 좋겠다 싶을 만큼 마음에 들었다. 여행 중 처음으로 갖게 된 독립된 공간이라 더 소중했다. 사실 여행에서 아무데서나 자면 되지, 하는건 가난한 자들의 위안이고 여행의 만족감을 높이는데 숙소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아주 오랜만에 꿀잠을 자고 또 잤다. 딱 하나 아쉬운 건 인터넷이 잘 되지 않았다는 거다. 와이파이는 겨우 한 두칸 켜지고, 심지어 데이터도 잘 잡히지 않아 강제로 스마트폰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고 이른 시간에 끊기는지라 오후와 저녁때 시내나 바닷가 마을을 구경하고 일찌감치 들어와야했다. 크지 않은 섬이라 걸어도 좋았지만 어둠이 찾아온 시골마을은 정말 깜깜하고 적막해서 좀 무서웠다. 근처 바닷가 슬렌디 마을에서 석양을 한참 바라보던 시간, 해가 지도록 해수욕을 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던 시간이 기억난다. 이틀간은 고조섬의 바다로 풍덩. 발품을 팔아 찾아낸 다이빙샵에서 펀다이빙을 예약했다. 이제 겨우 로그수 삼십회 정도인지라 다이빙을 할때마다 모든게 새롭고 긴장된다. 능숙한 몸놀림으로 빠르게 준비하는 사람들 틈에서 부랴부랴 장비를 고르고 바다로 따라나섰다. 차량으로 다이빙 포인트까지 이동하여 장비 착용하고 물에 입수하는 쇼어다이빙. 입수와 출수가 가장 힘들었다. 좀 더 나이들면 힘들어서 못할 것 같다. 고조섬의 바다는 깊고 차가웠다. 바다와 한몸이 되어버린 렉과 동굴 구경. 다이빙은 늘 신비롭다.
밤에는 시내 구경. 고조 섬의 시내, 빅토리아는 마침 축제 기간이라(무슨 성직자를 기념하는 기간이랬다) 사람들로 북적였다. 거리 장식들에 불이 들어오고 시간마다 폭죽을 펑펑 터뜨렸다. 딱히 뭘 하는 건 없어 보였는데 온 동네 사람들이 광장에 삼삼오오 모여 얘기 나누고 있었다. 요새와 성당, 광장을 기웃거리며 이 작은 섬의 들뜬 축제를 잠시 구경했다.
정들었던 숙소 주인 부부와 인사를 나누고, 고조섬을 떠나 슬리에마로. 한국 가기 전 마지막 여행지다. 지금껏 머문 곳들 중에 가장 번잡스런 관광지이기도 하다. 다이빙 샵이 가깝고 혼자 싸게 머물 수 있는 호스텔을 예약했다. 시설은 나쁘지 않았는데 고요하고 아늑한 곳에 머물다 온지라 상실감이 컸다. 그래도 한국인들이 어학연수로 많이 머무는 곳이라 그런지 한식당과 아시아 마트가 있다는 게 위안이었다. 만두와 순두부찌개 등을 사서 쟁여놓고 떡볶이 만찬을 즐겼다.
하루는 마지막 다이빙을 했다. 치케와 쪽에서 렉 다이빙. 블루 홀에 가보고팠는데 일정이 맞지 않아 아쉬웠다. 나머지 날엔 밀린 빨래를 하고 한국에 가져갈 선물을 사며 보냈다. 큰 맘 먹고 레스토랑에서 만찬을 즐기려다 눈탱이도 맞았다. 다음번엔 컴플레인 잉글리쉬를 반드시 배워 오리라.
이스탄불을 거쳐 한국으로. 터키항공 기내식이 몰타에서 먹었던 음식보다 맛있었다. 한국에 가까워질수록 상념이 많아진다. 그래도 아직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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