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책방 듣다가 흥미가 생겼다. 좀처럼 완독을 잘 못하는 편인데 도서관 대출 반납기한을 남겨두고 다 읽었다. 짧지 않은 분량이지만 지루할 틈이 없었다. 다채로운 이야기와 매력적인 인물들, 궁금증을 자아내는 스토리 전개와 끊임없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표현들로 흥미로웠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고, 시카고에선 이 책을 읽고 토론하는 캠페인을 벌일 만큼 사랑받는 책이란다. 명작을 오랜만에 읽었는데 과연, 많은 이들에게 오래 사랑받는 책은 무엇보다 재미있다. 

이 책은 일곱살 여자아이, 스카웃의 시선으로 본 30년대 미국 남부 사회를 그린다. 가난했던 대공황 시기, 엄마 없이 흑인 유모의 손에서 자란 이 아이는 천진함을 무기로 어마어마한 이야기의 화자가 된다. 스카웃이 만나는 마을 사람들 각각은 까칠하거나 괴팍하거나 편협하고 모순 투성이인, 어디에나 있을법한 사람들이다. (단 한명 완벽해 보이는 영웅이 있다면 아빠이자 변호사인 애티커스 핀치다. 그래서 가장 비현실적인 캐릭터. 훌륭한 인간이 훌륭한 부모가 될 수 있다니!) 스카웃의 시선을 따라 그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낯설고 이해할 수 없었던 모습들이 저마다의 삶의 맥락과 방식을 가진 한 인간으로 보인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나면 인종차별의 이슈나 사회적 정의 보다도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의 삶을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그러니까 끈기있게 질문하며 들여다본다면, 그리고 마침내 그 사람이 선 자리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무엇 하나 애틋하거나 아름답지 않을 리 없다.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이걸 시도조차 하지 않고서 감히 이해한다, 혹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단정짓지 말아야겠다.


"난 네가 뒷마당에 나가 깡통이나 쏘았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새들도 쏘게 되겠지. 맞힐 수만 있다면 쏘고 싶은 만큼 어치새를 모두 쏘아도 된다. 하지만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된다는 점을 기억해라."
"앵무새는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 줄 뿐이지.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뭘 따 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들 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 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어.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 거야." 

"하지만 나를 위해 한 가지만 약속 해 주렴. 고개를 높이 들고 주먹을 내려놓는 거다. 누가 뭐래도 화내지 않도록 해라. 어디 한번 머리로써 싸우도록 해 봐."
"아빠 우리가 이길까요?"
"아니."
"그렇다면 왜-"
"수백년 동안 졌다고 해서 시작하기도 전에 이기려는 노력도 하지 말아야 할 까닭은 없으니까."
"아빠는 아이크 핀치 사촌 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이번엔 사정이 다르단다. 이번에는 우리가 북부 사람들과 싸우는 게 아니고 우리 친구들과 싸우는 거야. 하지만 이걸 꼭 기억하거라. 그 싸움이 아무리 치열하다 해도 그들은 여전히 우리 친구들이고 이것은 여전히 우리 고향이라는 걸 말이야." 

"잭! 어린애가 뭘 묻거든 반드시 그대로 대답해줘, 지어내지 말고. 애들은 역시 애들이라지만 대답을 회피하는 지는 어른들보다도 빨리 알아차리거든. 그리고 대답을 회피하면 애들은 혼란에 빠지게 되지."
"음 아니야. 넌 스카웃의 행동에 답을 준 거야. 비록 그 이유는 좀 빗나갔지만. 욕은 모든 애들이 거쳐야 하는 한 단계야. 시간이 흘러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면 애들은 자연히 욕을 쓰지 않게 돼 있어. 하지만 성급한 성질은 그렇지가 않거든. 스카웃은 분별력을 배워야만 해. 앞으로 몇 달 뒤 겪을 일을 고려하면 말이야. 하지만 그 앤 잘 해 나가고 있어. 잼은 나이를 먹어 가고 있고, 이제 그 앤 제 오빠가 하는 본을 꽤 따르거든. 그러니까 중요한 건 그 애가 노력한다는 걸 내가 알고 있다는 거야."

"그래, 훌륭하신 귀부인이셨어. 할머니는 세상일에 대해 자신만의 생각을 갖고 계셨지. 내 생각과는 아주 다른 생각을. 아들아, 네가 그때 만약 이성을 잃지 않았어도 난 너에게 할머니께 책을 읽어 드리도록 시켰을 거다. 네가 할머니에 대해 뭔가 배우기를 원했거든. 손에 총을 지고 있는 사람이 용기 있다는 생각 말고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말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시작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는 것이 바로 용기있는 모습이란다. 승리하기란 아주 힘든 일이지만 때로는 승리할 때도 있는 법이거든. 겨우 45kg도 안 되는 몸무게로 할머니는 승리하신 거야. 할머니의 생각대로 그 어떤 것, 그 어떤 사람에게도 의지 하지 않고 돌아가셨으니까. 할머니는 내가 여태껏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용기 있는 분이셨단다."

"스카웃, 그거 알아? 난 이제 모두 알겠어. 요즘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서 알아낸 거야. 이 세상에는 네 부류의 인간이 있어. 우리나 이웃 사람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있고, 숲 속에 사는 커닝햄 집안 같은 사람들이 있고, 쓰레기장에 사는 유얼 집안 사람 같은 사람들이 있고, 흑인들이 있어."
"아냐. 누구나 다 배워서 아는 거야. 날 때부터 글을 읽고 쓸 중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월터도 자기 나름대로는 똑똑한 거야. 집에 남아서 아빠 일을 도와줘야 하기 때문에 종종 뒤처질 뿐이지. 그 애한테 잘못된 것은 없어. 내 생각으로는 오직 한 종류의 인간만이 있을 뿐이야. 그냥 사람들 말이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네 나이 때는 말이야. 오직 한 종류의 인간만 있다면, 왜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 못할까? 그들이 서로 비슷하다면, 왜 그렇게 서로를 경멸하는 거지? 스카웃, 이제 뭔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왜 부 래들리가 지금까지 내내 집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말이야, 아저씨가 집 안에 있고 싶어 하기 때문이야."

"이웃 사람들은 누가 죽으면 음식을 가져오고, 누가 아프면 꽃을 가져오고 그 중간에 해당하는 일에는 자질구레한 것들을 가져옵니다. 부 아저씨는 우리 이웃이었습니다. 아저씨는 우리에게 비누로 깎은 인형, 고장난 시계와 시곗줄, 행운을 가져다 주는 동전 두닢, 우리의 생명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이렇게 선물을 받으면 이웃 사람들은 답례를 하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때까지도 그 나무에서 얻은 것도 도로 돌려 주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나는 슬펐습니다."

"도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렸습니다. 가로등이 읍내까지 길을 환히 비춰 주고 있었습니다. 나는 여태껏 이 방향에서 우리 동네를 바라 본 적이 없었습니다. 모디 아줌마네, 스테파니 아줌마네, 그리고 우리 집이 있었고 현관에 있는 그네가 보였습니다. 레이철 아줌마네 집이 우리집 건너에 환히 보였고요. 듀보스 할머니네 집까지 보였습니다. 나는 뒤를 돌아다봤습니다. 갈색 문 왼쪽 편에 기다란 겉창이 달린 창문이 있었습니다. 그곳으로 걸어가 그 앞에서 있다가 돌아섰습니다. 아마 대낮이라면 우체국 모퉁이도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빠의 말이 옳았습니다. 언젠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래들리 아저씨네 집 현관에 서 있는 것 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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