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원제는 <선생님은 훌륭하다>이다. 선생님을 훌륭하다고 생각해야 할 것만 같은 제목을 가진 이 책은 사실 선생보다 제자, 배우는 사람의 주체성을 말하고 있다. 훌륭한 선생이란 제자가 그렇게 믿고 있는 한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선생님, 스승의 자격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배움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책이다. 저자에 따르면 훌륭한 선생과의 만남도,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일도, 그리고 진정한 소통과 배움도 오해에서 시작된다. 오해하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소통하려 하고, 오해의 독창성에서 각 개인의 개성, 정체성이 확인될 수 있다. 이것이 곧 배움이다. 배움과 소통에 대한 답 없는 고민들-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을 늘 품고 살았는데, 그것의 본질이 오해라니.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것을 인정하는 순간 배움과 소통의 욕구가 생겨날것만 같다. 


사람들은 대개 사랑에 빠지게 된 계기를 "그 누구도 모르는 이 사람의 훌륭한 점을 나는 알고 있다"는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좋은 점'을 나도 똑같이 아는 것만으로는 사랑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선생도 똑같습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 선생의 훌륭한 점을 나만 알고 있다는 '오해'로부터 사제 관계는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배우는 이유는 만인을 위한 유용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이 이 세계에서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다른 것과 교환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그릇에 맞춰서 각각 다른 것을 배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배움의 창조성, 배움의 주체성입니다. ... 학생을 교육의 주체로 삼는다는 것은 그저 제도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배움의 주체성'이라는 주제로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은 배울 수 있는 것밖에 배울 수 없다. 배우는 것을 욕망하는 것밖에 배울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늘 이야기를 할 때 듣는 이에게 내 말이 어떻게 닿을지 신경씁니다. 저 사람이 누구보다 나를 깊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나를 더 사랑해줬으면 좋겠다, 나에게 경의를 품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신은 그때까지 자신에게도 숨겨왔던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정보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즉, 지금까지 당신의 이야기를 이끌어온 것은 처음으로 준비했던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상대방의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다'라는 욕망도 아니고(왜냐하면 당신이 타인의 마음속을 알 리가 없기 때문에) 그저 당신이 추측한 상대방의 '욕망'입니다. ... 진정한 대화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제삼자인 것입니다. 대화할 때 제삼자가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이 바로 대화가 가장 뜨거울 때입니다."

기분 좋은 대화에서 말하는 측은 말할 생각이 없었지만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을 말했다는 성취감을 느낍니다. 또 듣는 이는 들을 생각이 없었지만 전부터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었다는 만족감을 느낍니다. 말을 바꾸면 당사자 각자가 자신의 욕망을 자각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경험이 대화의 본질입니다. ...우리에게 깊은 성취감을 가져다주는 '대화'라는 것은 '말하고 싶은 것'과 '듣고 싶은 것'이 먼저 있어 그것이 두 사람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말이 왔다갔다 하고 나서야 비로소 두 사람이 '말하고 싶었던 것'과 듣고 싶었던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대화를 하면서 가장 반갑고 기쁜 것은 '당신에 대해 더 알고 싶으니까 당신의 이야기를 더 들려줘!'라는 재촉입니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당신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가 아닐까요? ... 이쯤에서 메시지의 정확한 전달이 소통의 목적이 아닌게 아닐까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소통의 진정한 목적은 메시지의 정확한 전달이 아니라 메시지를 주고받는 그 자체가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소통 과정에서는 의사소통이 쉽게 이뤄지지 않도록 여러 가지 장치가 숨겨져 있는 게 아닐까요? 그렇게 되면 소통은 계속되니까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문장을 전진시키는 힘은 말이 생각을 채워주지 못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 물론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는 것투성이 문장'을 쓰면 누구도 읽어주지 않습니다. 역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술술 읽히는 문장'을 써도 누군가 두번 이상 읽어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잘 모르겠지만 뭔가 마음을 울리는, '확실히 그렇다'고 납득이 가긴 가지만 어디가 어떻게 납득이 가는지를 콕 짚어 말할 수 없는, 그래서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 그런 문장이 바로 독자에게 강하게 침투하는 문장입니다. ... 진정한 의미에서의 좋은 문장은 오독할 자유, 오해할 권리를 읽는 이에게 확보해주는 문장입니다.

인간의 개성이라는 것은 바꿔 말하면 '오답자로서의 독창성'입니다. 어떤 메시지를 어느 누구와도 다른 방식으로 오해했다는 사실이 그 수신자의 독창성과 아이덴티티를 결정짓는 것입니다. ... 모든 제자는 스승을 이해하는 데 실패합니다. 하지만 그 실패하는 방식의 독창성에서 다른 어떤 제자에 의해서도 대체될 수 없는 둘도 없는 사제 관계로서 계보에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선생이 선생으로서 기능하기 위한 조건은 그 사람이 젊었을 때에 일종의 채워지지 않음을 경험하고 그 결과 '영문을 알 수 없는-정체를 알 수 없는-아저씨'가 되어버린 경우입니다. ... '어른'과 '아이'의 분기점은 이 소통에서 오해의 구조를 자각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소통의 본질은 메시지의 '잘못 들음'이고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본성을 '잘못 보는 것'이라는 것을 뼛속 깊이 경험한 사람이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 "아, 그래 나의 아이덴티티라고나 할까 다른 사람으로는 대체 불가능한 둘도 없음이 다름 아닌 나의 '어리석음의 정도'에 의해 확인되는 거구나"라는 냉엄한 사실 앞에서 숙연해지던 차에 문득 젊은 객기로 마음껏 떠들던 때가 떠오르면 마침내 무기력한 '아저씨' 얼굴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렇게 함으로써 나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은가?' 하는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상대방이 있는 한 배움은 무한으로 열려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성숙할 수 있는 가능성은 오직 그 점에 있습니다. 제가 '스승은 있다'라는 말로 전하고자 한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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